파이트 클럽
파이트 클럽은 동명 소설 원작으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연출한 영화입니다.
주연은 90년대 황금기의 브래드 피트와
예술적 해석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노튼입니다.
이 영화는 에드워드 노튼의 이성적인 캐릭터와
브래드 피트의 본능적인 캐릭터가 극명하게
대비되는 케미가 중심이 되서 극을 전개하지만
퇴폐적인 것 같지만 위선이 없는 순수함을 보여주는
헬레나 본햄도 여주인공으로 비중있게 출연하였습니다.
(그녀는 해리포터의 벨라트릭스 역으로 유명하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은 헐리드우에서도
세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등
스타일리시 하면서도 지적인 작품 세계를
추구하는 감독입니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의 제작과
연출을 주력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가 영화를 통해 추구하는 성향으로 보면
기존의 헐리우드 흥행 공식보다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에 적합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마인드 헌터 이후로
러브 데스 로봇 등 현재까지 넷플릭스에서
주력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최근 한국 드라마 중에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히트한 오징어 게임의 황동혁
감독이나 지옥의 연상호 감독도
충무로 흥행 공식보다는 사회적으로
탐구정신이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을 보면
넷플릭스 적으로 잘 맞는 감독은
기존 박스 오피스 흥행 공식과는 차이가 있는데요.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은
넷플릭스 회사가 커지기 한참 전의
영화긴 하지만 다시 보니 역시
명작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해석은 기본적으로 몇가지가 있습니다.
철학적인 설명이 멋이 있는데 사실
일반 대중에게는 좀 귀에 잘 들어오지 않구요.
그만큼 깊이 있는 내용이다 정도로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이 포스팅에서는
주관적으로 리뷰를 해보려고 합니다.
작품이 너무 대단한 평가를 받는데
내용이 난해하면 해석하기에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기준을
잡으라면 그냥 대중들의 수준에서
느끼고 의미를 찾아내는 정도가
또 블로그 포스팅 정도에는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감상에 대해 100개의
해석이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약간 90년대 후반이 세기말이라서 그런가
이런 식의 관객에게 해석을 맡기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매트릭스 트릴로지 같은)
주제 의식
큰틀에서의 주제는 아나키스트 저항정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독재건 민주주의건 중앙정부의 시스템을
중요시하는 사회에는 아나키스트를
허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사회의 절대악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국가라는 큰틀을 유지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를 용인할 수 없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다수결에 의한
합의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는 테러분자입니다.
그런데 아나키스트는 도대체 어떻게
발생한 것 인가? 를 따져 볼 때 파이트 클럽
에서는 원래 우리 인간의 내면에 가진
폭력성, 어떤 태초의 원시인들이 생존하기
위한 본능으로 현대인들에게 보존되어 있는
욕망이 아나키스트의 원천으로 표현됩니다.
90년대 후반의 미국사회는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한국 같은 개발도상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자본이 발달하고 돈이면
뭐든지 다 될 것 같은 미국을 부러워 했으며
그건 세계인이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월스트리트는 전세계의 자본시장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 안에는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더 울프 오브 스트리트’는
그런 환락적인 돈의 끝판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또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라는 말은
가난한 국가의 서민이 미국에 이민가서
청소부 일부터 시작하여 헐리우드가 가까운
캘리포니아의 건물주가 되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런 시스템이 미국을 지배하는 가운데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본의 노예가 되서
본능적인 충동을 억제하는 사회가 되버립니다.
호텔의 웨이터나 접시닦이, 청소부, 경비원들은
자신도 언젠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할 것으로
믿고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순응합니다.
극중 파이트 클럽의 리더인 타일러(브래드 피트)는
이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우리 모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언젠가 백만장자,
영화 스타, 록스타가 될 것이라 믿도록 길러졌어.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아. 서서히 그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아주 아주 열받게 되지.”
영화 전반에서 타일러의 물질 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계속됩니다.
“니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결국 너를 소유하게 되지.”
“자유를 발견했어. 모든 희망을 잃는 게 자유야”
“모든 것을 잃어야, 어떤 것이라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
“너는 직업이 아니야.
너는 은행 계좌에 든 돈이 아니야.
너는 니가 운전하는 차가 아니야.
…
너는 모든 노래하고 춤추는 세상의 똥이야.”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별 설득력이 없겠지만
태초의 본능을 일깨우는 수단으로
파이트 클럽은 폭력을 가할 뿐 아니라
맞는 일도 합니다. 타일러가 중간에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에게 준 미션에는 타인을
열받게 해서 얻어 터지기도 있습니다.
파이트 클럽은 매우 원초적이고 폭력적인
시합이지만 여기서의 폭력은 타인에 대한
증오나 분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거대한 도시의 한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서민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 인생의
대부분은 부자나 고위 공무원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웨이터, 요리사, 경비원, 운전사, 청소부 등
타일러가 FBI 수사관을 협박할 때 이야기한다)
그저 맞고 때리는 자체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마치 다시 태어난 것 처럼
모두가 아나키스트로 변합니다.
이 이야기에 여자는 타일러의 O스 파트너인
말라 싱어(헬레나) 밖에 나오지 않아서
은근히 군대 남탕같이 느껴지긴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자신을 돌아보며
아, 나는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노예로
살고 있구나 정도를 느낄 수 있다면
감독의 의도에 어느정도 맞을 거라고 해석해 봅니다.
그걸 느낀다고 당장 내일 파이트 클럽을
만들어서 아나키스트가 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을 그렇게 쉽게
뒤짚을 수는 없는 것 이니까요.
단지 우리가 어디까지 와 있는 것인가
시야를 확보해주는 것 입니다.
미국은 2000년대 이후에 많이 변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두말할
필요없이 2001년 911 테러 사건입니다.
자본주의의 심장인 월스트리트의 한복판에
비행기가 두대나 정확히 박히고 그날
월스트리트의 사람들 수천명이 사망했습니다.
911테러는 중동과 서방세계의 갈등이지만
테러집단이 그것을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이때를 기점으로 미국식 자본주의가 모든 세상의
희망처럼 이야기하는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고
그 후의 역사는 우리가 본 것과 같지요.
이런 사상의 변화는 매우 큰 그림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평소에 우리가
잘 느끼지는 못하지만 역사적 사건을
10년단위로 보면 뭔가 바뀌고 있습니다.
파이트 클럽은 1999년 작으로 단순한
아나키스트 집단의 컬트 영화로만
두기에는 아까우니 좀더 다양한 해석을
추가할 수 있을 것 입니다.
명작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늘어가는데
파이트 클럽도 그런 면에서 여러번
감상하게 되는 영화 입니다.
줄거리 – 엔딩 노스포
이 영화는 고전적이긴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있는 영화기 때문에 포스팅이지만
아직 감상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스포는 안하려고 합니다.
*주인공 에드워드 노튼은 자동차 대기업의
리콜 담당 직원으로 지루한 일상속에
불면증에 시달리며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그는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암 모임 등
각종 환자 모임을 찾아다니며 나름의
위안을 얻고 불면증도 치유합니다.
실제로는 환자가 아니지만 환자인 척하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위로를 얻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말라라는 여자가
모임에 나타나면서 집중할 수 없게 되고
또 다시 잠이 오지 않게 됩니다.
리콜 조사를 위해 출장을 다니던 중
비행기에서 우연히 비누 제조업을 하는
타일러 더든을 만나고 자신의 집이
폭발로 화재가 일어난 날 타일러와 술을
마시다가 술집의 주차장에서
갑자기 서로 치고박습니다.
주먹으로 서로의 얼굴을 때려 보라고
상대를 도발하고 한참을 그렇게 싸운 후에
에드워드는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을 느낍니다.
집이 전소한 그는 아예 타일러의 집에서
같이 살기 시작하고 매주 술집에서
주먹다짐을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어느새 두사람의
싸움은 클럽이 될 정도로 회원이 늘어납니다.
파이트 클럽의 규칙은 파이트 클럽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처음 온 회원은 무조건 1대1 싸움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바깥에서는 서로 아는 척도 하지 않지만
파이트 클럽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한 마리의 “노래하고 춤추는 똥”(타일러에 의하면)
“우주 원숭이” 로 서로의 폭력성을 주고
받으며 원시 사회로 돌아갔습니다.
에드워드의 나래이션에서는 “여기서는
모두가 생생하고 살아 있다고 느낀다.”며
삶의 충실한 감동을 음미합니다.
리콜 심사를 하는 그의 죽어있는
현실과 강렬하게 대비됩니다.
그의 직장에는 전형적인 꼰데 매니저가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지만 파이트 클럽에서는
타일러 더든이 에드워드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줍니다. 타일러는 이 조직은
우리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고 말하는데 파이트 클럽의
회원들은 그를 더욱 신뢰하고 충성하게 됩니다.
타일러와 에드워드가 시작한
파이트 클럽의 규모가 점점 커나가고
나중에는 반사회적인 단체로 바뀌어서
각종 파괴행위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행동의 특성은 반달리즘(vandalism)
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회의 피지배 계층이
지배 계급이 만든 우수한 문물이나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 입니다.
에드워드는 이런 타일러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파괴행위에는 동참합니다.
여전히 파이트 클럽의 목적인 1대1 싸움을
통한 폭력의 교류, 몸의 의식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진짜 목적이 나옵니다.
진짜 목적은 억압된 본능의 사회에서
사람들을 해방 시키는 것 입니다.
모든 빚이 사라지면 더 이상 사람들이
빚 때문에 자본가들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파이트 클럽은 소수의 광신도 같은집단이 되었지만
그 뜻이 세상에퍼져나가길 바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과격한 행동도 서슴치 않습니다.
마침내 전 미국에 지부를 설립한
타일러는 모든 신용카드 회사의 건물을
붕괴시킴으로써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고
태초로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조직원들을 시켜서
10개 이상의 건물에 수천리터의
폭약을 설치합니다.
에드워드는 도가 지나친 타일러를
막기 위해 안간 힘을 다하지만 번번히
타일러와 그 부하들에게 저지당합니다.
간신히 폭탄이 실은 차량을 발견해서
해체에 성공한 에드워드를 발견한
타일러가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하고
결국 타일러가 승리합니다.
폭발 예정 시각까지 3분이 남은
상황에서 에드워드는 타일러와
마지막 대화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밝혀집니다.
감상과 추천
일단 굉장히 훌륭한 작품입니다.
약간 아쉬운 점은 박스오피스 흥행이
좋지 않아서 유명하지가 않습니다.
후에 2차 시장에서 대박을 냈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또 지금은 넷플릭스에서도
관람할 수 있습니다.
브래드 피트의 필모로 봤을 때는 육체적,
연기력, 인기까지 최전성기에 찍어서
두고두고 서양 상남자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규칙상 웃통을 까고 하는 파이트 클럽의
1대1 싸움에서 보여준 그 시크함
골반에 걸친 바지는 전세계 여성들에게
최고의 판타지적 만족감을 주었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뭔가 일반인이 그런
바지를 입으면 추접하다고 했을텐데
브래드 피트가 입으니까 패션의 완성과
몸의 완성은 얼굴이다. 이 말이 떠오릅니다.
영화에서 에드워드 노튼도 몸이
훌륭합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브래드 피트에 비견할 바는 아닐겁니다.
남자들간의 케미를 중심으로 하고
파이트 클럽을 남자들로만 구성한 설정은
라이언 일병구하기 류의 군대 영화나
쇼생크 탈출 류의 감옥 영화처럼
남성 중심의 사회를 묘사했다. 남탕이다.
라고도 볼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과도한 폭력묘사가 공감이 좀 떨어질 수
있겠다고 봅니다. 여성이라고는 말라 한 명이
나오는데 전혀 평범한 타입이 아니니까요.
그런 부분은 좀 감안하고 봐야합니다.
개인적으로 쇼생크 탈출을 본지 얼마 안되고
봤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남탕 영화는 주제의식을 부각하려고
의도적으로 여성 출연 비중을 줄인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넷플릭스 흥행 드라마 DP도 그렇다)
요새는 성인지 감수성이나 PC주의
이런 것들을 많이 중요시하는 사회다 보니
대중문화에도 영향이 크게 작용합니다.
비단 남녀간의 어떤 차별 문제 뿐 아니라
인종, 연령, 지역 그리고 빈부의 차별 등등
작품 하나가 나올 때에 신경을 써서
만드는 추세입니다. 뭐 영화의 발전을
위해서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겠지요.
다만 과거의 영화는 그 당시 시대상을
고려해서 평가하는게 어느정도 타당하기에
현재의 기준으로 과거의 작품을
칼같이 재단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이라면
지금 시대에 만드는 작품도 한 10년
뒤에는 의식이 떨어지는 평가를 받기
쉽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돈을 벌어 먹고 살기 위해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 인정받을
작품만을 목표로 만드는 것은 어렵습니다.
후대에 평가하는 것은 쉽지만
막상 그 시대에 뭔가 만드는 일은
어려운 법이니 그 점을 존중해줘야합니다.
그런 면에서 파이트 클럽이 남탕을
중심으로 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작품의 주제는 아나키적으로 가지만
그 시작은 사나이들이 몸으로
치고박는 본능적인 폭력성과 욕구에서
출발하였다 – 고 보니까 철학적으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철학은 잘 모르지만 어쨋든 폭력을
단순히 악한 행위가 아니라 그 뒤에
깊은 원초적 차원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폭력성이 짙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는 아닙니다.
좀 UFC의 길거리 실사판? 처럼 룰이
있긴 하지만 심판도 없고 지하실
씨멘트 위에서 싸우는 묘사가 많은데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 저렇게 싸우면
매우 높은 확률로 식물인간이나 장애인됩니다.
(시멘 바닥에서 파운딩하는 장면을 보면
두개골 골절에 의한 뇌출혈이 일어날 것 같음.)
아직 분별력이 정확하지 않은 청소년과
아이들은 봐서는 안되구요. (18세 관람불가 등급)
과도한 폭력묘사를 싫어하는 분들에게도
별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반면 브로맨스를 그린 전쟁영화, 쇼생크 탈출같은
브라더 케미, 심리상태를 다룬 영화를 즐겨 보는
분들에게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격투기 매니아 분들에게도 당연 추천할 수 있고요.
뭐 길거리 싸움이란게 태권도 발차기 처럼
화려하지 않고 투박합니다. 그런데 격겜 매니아들
중에는 이런 길거리 싸움에도 해박한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충분히 즐기실 수 있습니다.
또 길거리 싸움꾼 중에는 브래드 피트 같이
마르고 탄탄한 몸이 간지도 나고 기술도
좋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상미는
브래드 피트의 상체가 담당하는 것이죠.
전성기 때의 몸이라서 정말 최고입니다.
(물론 몸의 완성은 얼굴이다는 공식으로;;;)
아나키스트 사상을 추구하는 분들에는
오히려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20년 전의 영화니까 현재의 첨단 기술과
아이디어에 비하면 투박하지요.
생각하는게 신용카드 회사를 다 박살내면
세상이 평등해질 거라는 좀 순진한 발상이니까요.
지금은 첨단 IT해킹 기술, 드론 기술 등
아나키스트들이 사용할 수 있는게 많습니다.
좀 시시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20년도 더 전의 아이디어니까요.
그밖에 브래드 피트나 에드워드 노튼의 팬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보셨겠지만
다시 봐도 볼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