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블린 슬레이어
RPG에서의 서사
이세계 다크판타지 물이라는게 과거에는 동인지의 영역이었다면 지금은 시간이 흘러서 하나의 장르적으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판타지물의 계보를 따라가면 로도스도 전기가 있고 이는 또 서양의 반지의 제왕이나 던전앤드래곤의 TRPG 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넷플릭스가 이런 쪽을 좀 좋아하는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넷플릭스 오리지날 중에 갓히트 작인 기묘한 이야기의 시즌 1의 이야기의 발단에서 윌과 친구들이 TRPG 게임을 하다가 일종의 저주같은 것을 받아서 자연스럽게 이세계에 얽히게 된 것을 보면 애지간히 오타쿠적인 시나리오를 채택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 오타쿠설)
RPG는 흔히 컴퓨터로 구현된 롤플레잉 게임을 말하지만 원조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앉아서 게임의 참여자와 게임마스터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지는 TRPG 입니다. 지금의 RPG게임이라는 것은 원래 RPG룰을 판정하고 게임 진행을 맡았던 사람이 주관하던 게임을 80년대 이후 컴퓨터 게임기술이 발전하면서 게임내 마스터를 프로그램이 대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게임을 주관하면 끝이 없이 즐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상상력이란게 끝이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것이 컴퓨터 게임으로 대체되면서 상업적 제품이 되었고 시작과 결말이 있는 서사 개념이 도입되었습니다. RPG 장르에는 주인공의 모험의 시작과 마왕(같은 절대적 악)을 무찌르는 서사를 중요시 하게 됩니다. 원래 TRPG를 하는 사람들에게 모험의 한계나 끝은 없었죠. 마왕을 쓰러뜨리면 다음 마왕이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마녀가 나타나고 더더더 강한 존재가 모험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습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사이클을 가지기 위해서 RPG 게임이란 장르가 정착되고 시작과 끝을 가진 서사가 정착이 되었습니다. 그중에도 가장 심한 편향을 보인 것은 일본식 RPG였습니다. 지금은 완전 고인물들의 향수가 되버린 일본의 초대 RPG 히트작인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와 기술적인 혁신을 도입하여 시장의 판도를 장악했던 파이날 판타지 시리즈가 대표적이지요.
이 두 시리즈가 가진 RPG 서사는 항상 시작과 끝이 분명한 드라마 장르입니다. 하지만 원래 TRPG라는 것은 최종 목적이 없던 것 이었습니다. 설령 그런 목적이 있더라도 반지의 제왕처럼 세계관의 확장과 서사의 스케일이 리얼하고 웅장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게임 한판만 하고 끝날게 아니라 내일도 와서 다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사람들이 모여서 다시왔는데 게임할 내용이 없어요. 컴퓨터 게임은 프로그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인간이 만드는 TRPG는 그 한계를 깨버립니다. 바로 서사(스토리)를 만드는 거죠. 서사에서 끝을 한정지어 버리면 사람들이 이 게임을 할 이유가 없어지고 이는 소재의 고갈이란 너무나도 허무한 한계로 이어지게 됩니다.
약간은 다른 이야기지만 리니지로 대표되는 한국적인 MMORPG에는 서사가 없습니다. 오로지 더 강해지고 게임내 재화와 권력과 명예를 쟁취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에 대한 비판도 많이 있겠지만 리니지는 서사라는 것은 유저가 만드는 영역이다. 우리는 시스템만 제공한다~ (너무 시스템만 제공해서 최근에 문제가 되지만) 는 발상은 괜찮은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웬지 리니지의 주가도 그렇고 욕을 많이 먹고 있지만 본질을 따지고 보면 그렇습니다. 서사에 집착한 일본식 RPG는 현재 어떻게 되었나? 서사없는 RPG 생태계 구축에 몰두한 한국식 RPG는 현재 어떻게 되었나? 현재의 상황을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습니다. 둘다 난관에 봉착해있죠.
고블린 슬레이어의 세계관
기존 판타지물 RPG의 설정과 전혀 다른 이세계 다크판타지는 넷플릭스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서사가 없습니다.
서사가 없는데 그것을 리니지 처럼 유저들이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방관하는 듯한 모습에 현실을 살아가는 보통의 플레이어를 묘사합니다. 고블린 슬레이어 세계관에도 최종빌런인 마신왕을 쓰러뜨리는 용사가 존재하지만 주인공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주인공 ‘고블린 슬레이어’는 자신의 누나가 눈앞에서 고블린 집단에게 몹쓸짓을 당하고 살해당한 트라우마로 오로지 고블린 퇴치에만 몰두합니다.
기존의 RPG아류 들은 각종 몬스터들을 등장시키고 설정의 허술함을 보이는 것에 비해서 고블린 슬레이어는 고블린이라는 대상에 집중을 합니다. 이것은 그 내용의 허구성과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하는데요. 고블린이 머리도 나쁘고 강하지 않지만 군집생활을 하기 때문에 때로 인간에게 큰 위협이 된다는 점이나 이 세계관에서 국가는 고블린을 정식 군대로 막지 않고 모험가에게 의뢰한다는 설정 등 몇가지 전략적 요소만으로도 기존의 드래곤퀘스트 식의 식상한 RPG의 설정의 진부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애니 시즌 1 중반부 이후 고블린 슬레이어도 파티를 이루는데 파티의 구성원은 사실 로도스도 전기 식 구성의 변형입니다. 흄(휴먼) 전사, 활을 사용하는 하이엘프, 도끼와 술법을 사용하는 드워프, 리자드 법사, 기적(치료계 마법)을 사용하는 신관.
이 조합 자체는 매우 진부하지만 지하 던전의 전략적 전투 요소와 목적 자체는 신선했습니다. 이들은 세계를 구하려고 고블린과 싸우는게 아닙니다. 세계를 구하는 것은 마신왕을 쓰러뜨리도록 선택된 영웅들이고 고블린 슬레이어는 재능이 없는 일반인 출신입니다.
과거 대부분 일본식 RPG류는 용사가 신과 이 세계에서 선택된 사람으로 묘사를 하는데요.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블린 슬레이어를 지켜보고 있으면 불리한 상황에서 역경을 딛고 완벽한 승리를 이끌어 냈던 실제 인물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역시 신이 준 재능을 가진 선택된 인간보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한 인간에게 더 큰 박수를 주는게 또 인간세상입니다.
반면 선택된 재능의 인간이 현실에서 몰락하는 것도 무수히 많은 것도 인간 세상의 특징입니다. 그런면에서 고블린 슬레이어가 동인지 쪽 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일본의 동인지 문화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이너한 동인지 쪽 사람들이 지금은 메이저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다시 일본 RPG계열 애니를 보게 만든 이유입니다.
90년대 이후 드래곤 퀘스트 식의 용사 RPG에 오랫동안 팬 이었지만 최근 10년간은 거의 게임을 못했는데 이는 진부한 용사-마왕 서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플레이어가 진화하는 다크 판타지인 다크소울은 꽤 오래 했었죠. 그래픽이 리얼해져서 했던 것도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적으로 보면 이게 다 이유가 있는 것 입니다.
고블린 슬레이어의 세계관은 간단합니다.
어떤 목적이 없습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고 그 과정속에서 수많은 여캐들과 로맨스 케미나 매력적인 중립, 혹은 빌런 캐릭터 들과 라이벌 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고블린 슬레이어는 그런게 없습니다. 주인공 ㅇㅅㄲ는 밥먹듯이 ‘고블린이냐?’ 이 말밖에 할 줄 모릅니다. 하루종일 고블린 이것들을 어떻게 죽일까만 생각하고 있는 주인공은 실제의 인생과도 많이 닮아있습니다.
공감적인 부분
이 세계를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은 하루종일 한 두가지 생각만 하고 살아갑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은 오늘은 어떻게 공부할까? 구두를 만드는 사람은 오늘은 어떤 구두를 만들까? 장사를 하는 사람은 오늘은 어떤 손님이 올까? 사람들의 인생은 단순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판타지물이지만 공감을 이끌어 냅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나 최근 넷플릭스 초히트작인 오징어게임도 그렇고 본질적으로 보면 전세계인들의 공통되는 공감을 강하게 이끌어 냅니다. (D.P도 그렇고) 이게 한국에서 만든 극화인데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의 국민들이 마치 자기가 겪고 있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이것이 K 공감력인가?? ㅂㄷㅂㄷ;;;;) 보통사람의 공감력이란 부분에 어필한게 고블린 슬레이어의 큰 매력이라고 보구요. 이것을 보면 중세 판타지가 되었건 원시인이건 미래 사회이건 소재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 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극중 고블린 슬레이어가 되기 위해서 주인공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는지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주인공은 고블린들은 멍청하고 약하지만 학습능력이 있고 집단 지성 같은게 있어서 절대로 방심하지 않습니다. 초보 모험가들은 고블린을 우습게 알다가 매우 비참하고 잔혹하게 살해당하거나 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보통의 인간으로써 최고 등급의 모험가인 주인공은 절대로 방심하지 않죠. 고블린을 죽일 때 마다 숫자를 세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약한 고블린도 숫자를 세며 확인 사살까지 하는 모습에는 어쩌면 이 주인공은 그동안 우리가 판타지 물의 용사라고 생각했던 그런 허술한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이고 완벽한 영웅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확실히 기존의 용사 클리셰는… 2021년에 전혀 맞지가 않습니다. 특히 판타지 물이라는게 일본 RPG계로 들어오면서 남성의 판타지 물이 되었다. 그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보통 일본식 판타지의 RPG의 주인공에 여성 편력을 과도하게 설정해서 할렘물이 되는 경우가 흔하고 결국 가장 완벽한 여성과 모두를 만족시켜주는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이런 스토리에 영향을 받은 오타쿠남자들이 현실에서는 매력이 없고 이상적인 상황, 이상적인 여성에 집착하는 경향에 대해 사회적으로 조롱하고 비판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정신승리겠죠. ㅇㅇ 라능? ㅇㅇ쨩 아이시떼루? 아 이런 비판도 클리셰인가;;;
여담이지만 오징어게임 이전에 큰 충격을 줬던 D.P의 조석봉 일병이 일본 아니메의 오타쿠로 나와서 현실에서는 군대 선임들에게 조롱받는 뭔가의 당위성을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가지의 시각을 은밀하게 음미하죠. – 왜 저렇게 심하게 때릴까? – 그래 오타쿠 넌 하는 짓이 맞아도 싸
황장수 병장이 조석봉 일병의 아니메 그림을 보면서 욕과 구타를 하는 장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납니다. 이것은 군필자 남자라면 충분히 공감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군대 = 현실 마초들의 세상 오타쿠 = 마초 고참에게 조롱 + 쳐맞는 분위기. 지금은 바뀌는 중)
하지만 예전과 달리 요새는 한분야의 달인이 되기 쉬운 오타쿠들이 사회에서 더 크게 성공하는 케이스가 늘어나고 있고 사람들 자체 생각도 많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고블린 슬레이어 같은 작품이 이제는 주류로 나오는 것은 이런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아마 90년대에 이런 스토리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겠죠. 뭐든지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총평 / 감상평
용사의 이야기도 좋아하지만 이런 식의 끝나지 않는 서사도 좋아합니다. 아니 시대적으로는 더 인기가 많은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용사가 마왕을 무찌른다는 스토리는 뭐 좋아하긴 합니다만 웬지 아쉽잖아요. 시작과 끝이 분명하니까 아쉽습니다.
최근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에서 대 히트하면서 생각한 것인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 사회라는 시스템의 게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오징어 게임의 시즌 1보다 시즌2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현실의 게임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456억의 상금을 받으면 인생이 끝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다음의 게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더욱 혹독하고 답이없는 게임일지 모르는 것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고블린 중에 가장 강한 고블린 챔피언(덩치가 10배 이상 큼)을 쓰러뜨리고도 평소와 같이 생활을 합니다. 다음에 쓰러뜨릴 고블린을 생각하는 거지요.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최종 빌런이란 것은 없습니다. 직장생활에 대입하면 악마같은 상사가 퇴사하니까 그 보다 더한 놈이 윗대가리로 들어오더라는 법칙 처럼 인생이란 끓임없는 투쟁입니다.
고블린 슬레이어의 삶도 그와 같습니다. 아무리 고블린 챔피언을 쓰러뜨리고 고블린을 수백 수천을 죽이더라도 자신의 눈앞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누나의 PTSD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즌 1 후반부에 검의 무녀도 고블린 슬레이어에게 비슷한 말을 하는데요. 아무리 현실에서 영웅인 사람도 과거의 악몽을 벗어나지 못해 꿈에서 고통받는 것이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계속 고블린을 죽여야 하는 것 입니다. 이는 원작의 파워가 정말 대단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다크판타지다 보니까 아직 원소스 멀티유즈 IP는 제대로 나오지 않은 것 같은데 앞으로의 세계관 확장이 더 기대가 되는 작품입니다. 뭐 상업적으로 키울려면 고블린 이상의 것들도 다룰 수 있겠죠. 시작이 일단 고블린에 집중한 내용이라 매우 좋은 것 같습니다.
*고블린 슬레이어는 아무에게나 추천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다크계열의 반대가 라이트(light)계열이라면 라이트 쪽에 지친 사람들, 다크 성향이 맞는 경우 진짜 재미있습니다.
게임이라면 프롬소프트웨어의 다크소울 시리즈를 재미있게 했다면 추천합니다. 다크소울 류의 게임은 허구헌날 어떻게 몹들을 죽일까만 고민하는 게임인데요. 내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강해져야 게임이 쉬워지는 그런 류가 취향이라면 고블린 슬레이어도 그런 쪽입니다.
반면 빛의 용사 쪽 계열을 좋아하면 비추입니다. 입맛이 좋지 않습니다. 종합적으로… 넷플릭스에 이세계 류의 애니가 많기 때문에 즐겨보고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상당히 추천할만 하다. 다만 호불호가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추천한다는 뜻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