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효창공원 의열사

서울 효창공원 의열사

효창공원 의열사

의열사는 효창공원에 모셔진 애국선열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1988년 11월 정부가 주도하여 효창공원 정비 공사가 추진되었으며 1990년 11월 의열사와 창열문이 세워진 뒤, 1991년 7월 선열들의 영정을 이곳에 모셨습니다.

효창공원 위치

효창공원은 6호선 효창공원앞역 1번출구에서 도보로 10~15분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의열사

서울 효창공원 의열사

석오 이동녕 선생

석오 이동년 선생은 1919년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직으로 시작하여 7대 임시정부 주석직까지 맡았습니다. 별세하는 1940년 죽는 날까지 임시정부 주석이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탱한 정신적 지주셨습니다. 조국이 광복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청사 조성환 선생

청사 조성환 선생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임시정부에서 주로 군무부 일을 하여 중국정부와 협의해 1940년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에 크게 이바지 하셨습니다. 광복군은 여러 우여곡절이 있고 후에 세계의 정세가 변화하며 남한에 미군정이 세워지자 1946년 무장 해제 상태로 귀국하였으며 광복 이듬해인 1946년6월 해체되었습니다.

국군의 시초는 1945년 해방병단이 시초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일부 사람중에 광복군을 국군의 시초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동암 차리석 선생

동암 차리석 선생은 신민회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일제의 감옥에 3년간 복역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국장,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1945년 8월 중경에서 광복 소식을 접하고 환국준비로 인한 과로로 9월9일 환국 직전 사망하셨습니다. 사망 직전 광복이 되었음에도 고국 땅을 밟지 못한 것을 애통해 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김구 선생 주도로 그의 유해는 이동녕 선생과 함께 1948년에 효창공원에 안장됩니다.

백범 김구 선생

백범 김구 선생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을 겁니다. 그만큼 대중들이 사랑했던 민족의 스승으로써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김구 선생을 가장 경계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구 선생에 대해 일제가 내걸은 현상금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400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만큼 일제에 있어서 눈에 가시같은 존재,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는 스승이자 지도자셨습니다.

남과북이 갈라지고 70년이 지났는데 선생이 염원했던 통일 국가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지요.

이봉창 의사

이봉창 의사하면 호쾌한 이미지의 청년 이미지 입니다. 젊은 시절 일본을 좋아하여 일본인 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어느날 백범 선생을 찾아와서는 31년간 육신의 쾌락을 대강 맛보았다고 하며 이제 영원한 쾌락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영원한 쾌락은 바로 대한의 독립사업이었습니다.

이렇듯 괴짜같은 이 의사의 진심을 알아준 것은 김구 선생이었고 이 의사는 한인애국단에서 일본 천황을 암살한다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931년) 당시의 일왕 즉 천황은 신급에 가까운 존재로 천황의 암살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1932년 1월8일 이봉창 의사는 무려 일본 제국 도쿄 경시청에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는데 안타깝게도 실패합니다. 천황에 대한 반역으로 사형을 선고 받은 이 의사의 집행은 그해 10월 이루어집니다. 향년 32세.

이봉창 의사의 이야기를 보면 임시정부에 접근한 방식이나 그 캐릭터의 의외성에 놀라게 되는데 만약에 천황 암살이 성공했으면 동아시아의 정세가 바뀔 수도 있던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 이상의 파격적인 사건이었겠지요.

구파 백정기 의사

근대식 머리 가름마가 스타일리시한 백정기 의사는 아나키스트 계열 독립운동가로 조직적으로 일제에 무장항쟁을 했습니다. 1933년 상해에서 일본의 정치와 군대의 요인들의 습격을 준비하다가 정보가 세는 바람에 일본제국에 붙잡힙니다. 그 후 백 의사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사망합니다.

이쪽은 김구 선생이 지도자로 있던 임시정부와는 사상이 다르지만 일제라는 공동의 적에 각자의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광복 후 그의 유해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100년 가까이된 지금 보면 아나키스트는 좀 간지가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보이네요.

매헌 윤봉길 의사

매헌 윤봉길 의사는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중에 한분입니다. 상해 홍커우 공원의 의거로 일본 지도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힙니다. 도시락 폭탄을 사용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수통형 폭탄을 던지고 거사가 성공했습니다. 예비용인 도시락 폭탄은 사용하지 않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 않았습니다.

홍커우 의거에서 일본 제국 윤군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 및 다수 일본군을 사살하고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츠 마모루 등 요인들을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USS 미주리 함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에 일본 대표로 참석한 외무대신인 시게미츠 마모루는 홍커우 의거의 생존자입니다. 시게미츠는 이 때 다리를 절뚝이며 나타났는데 외신은 그가 한국인 애국자(Korean Patriot)에 의해 부상을 입었다고 보도합니다. 그 한국인 애국자가 바로 매헌 윤봉길 의사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윤 의사의 홍커우 의거로 인해서 중화민국의 장제스가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윤봉길 기념관 등에서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주장입니다. 당시 폭탄의 제조도 중국인이 했었고 일제의 침략과 싸우던 중국에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요한 파트너 였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가 성공하고 나서 중국인들도 매우 기뻐했다는 것은 당시 신문보도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24살이라는 청춘에 한인애국단의 김구 선생의 지시에 따라 홍커우 공원 의거를 실행합니다. 김구 선생의 일생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만남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마지막에 김구 선생과 시계를 바꿔차고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윤 의사는 자신의 시계는 고작 한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며 선생님은 더 오래 살아서 나라를 지키시라고 말합니다.

김구 선생은 차에서 내리는 그에게 목이 메어 ‘후일 지하에서 봅시다’라고 말합니다. 적군이 가득한 사지에 홀로 윤 의사를 보내는 김구 선생의 마음은 어땠을지 상상도 하기 어렵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은 매헌역(양재시민의숲역)에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

시대적으로는 위의 삼의사보다 안 의사가 훨씬 전에 의거를 하셨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과 이토 히로부미는 역사 교과서에서 비중있게 다뤄지고 각종 드라마에서 소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내용이지요.

안 의사의 유해는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일제가 마음대로 암매장 했는데 위의 삼의사와 달리 1910년이다 보니까 광복 후에 찾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 봅니다. 1932~34년 돌아가신 삼의사의 유해를 찾은 것도 10년이 넘어서 대단한 일인데 안 의사는 그보다 20년 전에 일제에 의해 돌아가셔서 결국은 못찾았습니다. 효창공원에 가묘를 세운 것은 어떻게 보면 한인애국단의 시초격인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인 것 같습니다.

백범 일지에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도 면식이 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학란 때의 일화인 것 같은데 김구 선생은 안중근은 활을 매우 잘쏘는 젊은이로 기억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도 총탄을 정확하게 맟춰서 불과 30분 만에 사망했다고 나옵니다. 당시에는 영상의 시대가 아니라서 안 의사는 이토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는데 사진 한장 보고 러시아군의 경비가 삼엄한 하얼빈 역에서 이토를 정확하게 쓰려뜨렸다니 타고난 저격수 였다는 것이지요.

개인적인 바램은 이제라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굴되어 정식으로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외치던 안중근 의사를 고국땅에 모시지 못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큰 손해입니다.

효창공원의 유래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유서 깊은 장소로, 1989년 6월 8일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효창원으로, 정조의 큰아들인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 등 왕가의 묘를 모신 곳이었다. 효창원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1944년에는 일제에 의해 왕가의 묘들을 강제로 서삼릉(경기도 고양시)으로 이장 후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광복 후 1946년에는 김구 선생의 주도로 일본에 있던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국내로 모시고 와 그해 7월 6일 국민장을 치른 뒤 효창원 안의 옛 문효세자 묘역에 안장하였다. 안중근 의사 유해를 찾지 못해 향 후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기로 하고 세 의사 묘 옆에 가묘를 만들었다.

이후 김구 선생의 주선으로 중국 땅에서 순국한 이동녕, 차리석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1948년 9월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사회장을 치른 뒤 효창공원에 안장하였고, 다음 달인 10월에는 귀국한 뒤 서거한 조성환 선생의 장례를 경성부민운동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른 뒤 안장하였다. 임정 요인의 묘역은 옛 의빈 성씨의 묘터에 만들었으며, 묘역 주변이 현재와 같이 조성된 것은 1991년 11월이다.

마지막으로, 1949년 6월 26일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여 7월 5일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른 후 이곳에 안장하였다.

이처럼 효창공원은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한 애국선열들의 유해를 모신 뜻깊은 장소로 이후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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