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과 끝
암기를 하는데 있어서 막연하게 범위를 넓히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 암기에 특출난 사람은 한번에 종합적으로 사물과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겠으나 보통의 일반인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보통의 인간이란 단기기억의 작업공간에 제한이 걸리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가 한번에 번호를 7-8자리 정도까지 단기 기억할 수 있는 것 이라던가, 시장 볼 리스트의 물품들을 종이에 써넣지 않으면 막상 수퍼에 가서 까먹는 일이라던가 모두 단기기억 용량의 제한이라 할 수 있다.
암기는 특정한 문자의 조합이나 혹은 전체 문장을 기억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뭐 한두문장 정도야 기억이 쉽다. 예를 들어 ‘시간은 금이다’는 누구나 바로 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은 금이다. 시간은 화살처럼 빠르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와 같이 문장을 한개 두개 추가할 수록 급속도로 외우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기기억의 한계 때문이다.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가장 정석적이고, 또 하나는 암기의 테크닉을 써서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구조를 짜고, 또 그 상태 그대로 머리속에서 기억을 인출하는 방법이 있다. 이 두가지 방법을 반복하면 결국 장기기억화가 되는 점은 같지만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도달하냐는 차이가 있다.
리스트 외우기
이번 포스트는 시작과 끝을 활용한 리스트 외우기를 해보겠다. 리스트 암기는 문장은 아니고, 단어들이 나열된 것으로 암기 기술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리스트를 외울 수 있으면 문장도 외울 수 있게 되니까 암기술 초보자는 이것보다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실 리스트를 외우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고,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보면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토니 부잔 계열 암기왕들은 이미지 연상을 활용하는 리스트 암기에 능한데 필자도 좋아하는 방법이다. 다만 암기법이 영어베이스라서 한글 사용자는 적당히 변형해서 사용해야 적용이 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포스트의 방법은 공부암기법이기 때문에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예시: 건축물 용도
예시는 다음의 건축법 시행령의 건축물 용도 30종을 외워본다.
- 단독주택
- 공동주택
- 제1종 근린생활시설
- 제2종 근린생활시설
- 문화 및 집회시설
- 종교시설
- 판매시설
- 운수시설
- 의료시설
- 교육연구시설
- 노유자(老幼者: 노인 및 어린이)시설
- 수련시설
- 운동시설
- 업무시설
- 숙박시설
- 위락(慰樂)시설
- 공장
- 창고시설
- 위험물 저장 및 처리 시설
- 자동차 관련 시설
- 동물 및 식물 관련 시설
- 자원순환 관련 시설
- 교정(矯正)시설
- 국방ㆍ군사시설
- 방송통신시설
- 발전시설
- 묘지 관련 시설
- 관광 휴게시설
- 장례시설
- 야영장
보통 30종 정도의 리스트를 외워서 쉬지 않고 말하거나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1번부터 30번까지 차례로 외우는 것도 사실 방법이 아니다.
누구나 학창시절에 학교의 시험을 위해 이런 리스트를 외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태어나서 암기를 처음 시작하는 학생이라면 맨땅에 헤딩하듯 깜지를 쓰거나 무한반복 등도 경험한다. (꽤 성실한 학생들이라면) 중학교 정도라면 그런 방법도 효과는 있다, 그러나 머리가 더 자라서 성인이 되면 1차원적인 방법으로 암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점점 더 암기 능력이 떨어진다고 말 할 수 있다.
성인이 된 후 저런 리스트를 외워야 한다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겠는가 – 를 생각하면, 암기를 시도조차 못할 가능성도 있다. 우리의 뇌는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퇴화하기 때문에 더욱 암기와 멀어지게 되니 악순환의 반복이다.
시작과 끝: 기준잡기
30종을 암기하는 출발점은 우선 기준잡기이다. 시작과끝을 잡으면 암기의 압박감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뇌는 시작과 끝을 강렬하게 의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은 사물에 한계를 정한다는 것과 같다. 뇌는 이 내용을 위해 얼마의 공간을 할당해야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시작과 끝을 설정하면 뇌가 받아들이고 시작할 수 있게 해준다. 생각해보면 인류가 이룩한 무수한 일들에 시작과 끝이 있는데 개인의 뇌에 이를 적용하는 암기법인 것이다.
뭐 지식의 구조화라는 것은 학식이 있는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기능은 학계를 위해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주 먹을 식료품을 위한 장바구니 리스트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위에 건축물의 용도 30종과 식료품 30종을 암기하는 방법에는 별 차이가 없으니까, 너무 진입장벽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자, 그럼 시작해보자. 위의 리스트는 30개인데 시작과 끝은 임의적으로 정해도 된다. 필자의 경우 다음과 같이 정했다.
시작: 주택(단독/공동)
끝: 야영장
1,2번은 단독, 공동 차이만 있고 주택이 공통점이다. 해서 주택에서 시작한다고 잡았다. 야영장은 30번이기도 하지만 주택에서 출발해서 야영장에 도착한다고 하면 말이 되니까 야영장을 끝으로 잡았다. 이를 문장으로 바꾸면 ‘주택에서 야영장으로 간다’ 가 되는데 이 문장이 이제 30종을 암기하는 트리거인 것이다. 목적은 시험을 보러가기 전에 이 한문장을 종이에 적고 가면 30종의 용도가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위 문장으로 30종의 범위를 한정하고 기준을 잡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안에 내용을 채워넣는 방법은 조금 더 작업을 해야하는데 이번 포스트에서는 필자의 예시를 설명하고 다음 포스트에 좀 더 방법을 다루도록 하겠다.
다음 단계에서 내용을 추가한다.
시작:주택(단독/공동)
1종/2종 근린생활
'ㄱ'로 시작하는 용도(5): 공장,관광휴게,교정,교육연구,국방군사
'ㅇ'로 시작하는 용도(7): 야영장,운동,운수,위락,위험물저장및처리,의료,업무
끝:야영장 - 장례
시작의 공동에서 ‘공’과 글자가 같은 ‘공장’을 뽑아내고 거기서 ㄱ으로 시작하는 나머지 용도를 외운다. 그 다음에 끝의 ‘야영장’은 ㅇ으로 시작하는 용도를 외우고, 장은 ‘장례’로 이어간다.
같은 자음으로 모으는 것은 기초적인 분류법인데 생각보다 파워풀하다. 그리고 옆에 숫자를 써놓는 것은 같은 자음에 몇개가 있는지 범위를 한정하기 위해서이다. 숫자가 5-7개 정도면 처음에는 힘이 들 수 있지만 센스가 있다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정 힘들면 3개 정도 외우는 연습부터 하면 좋다.
이렇게 외우면 놀랍게도 벌써 4+5+7+1 = 17개 리스트를 외운 것이다. 시작과 끝을 정해놓고 거기에 연결된 단어를 하나씩 꺼내도록 연결을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자음 정렬방법을 기본으로 사용했는데 세부적인 암기방법은 이미지 연상법이라던가 다른 것을 써도 된다.
필자는 공부암기법에서 다른 연상의 매개체를 최대한 줄이고 글자 자체를 이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미지 연상암기법이 좀 더 오래가긴 하는데 어차피 그것도 기억이 희미해진다. 필자의 글자암기법은 수험목적으로 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짧은 메모를 보고 전체를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다.
중간기점: 내용이 많은 경우
중요한 것은 시작과 끝을 기준점으로 잡은 것이다. 그런데 리스트 항목이 많아지면 시작과 끝으로는 중간이 잘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시작과 끝의 중간기점을 하나 잡아줘도 좋다.
중간기점을 하나 더 잡는다는 것은 최초 문장에 내용을 추가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주택에서 야영장으로 간다’를 ‘주택에서 자동차로 야영장으로 간다’로 바꾸면 자동차가 중간기점이 되는 것이다.
시작:주택(단독/공동)
1종/2종 근린생활
'ㄱ'로 시작하는 용도(5): 공장,관광휴게,교정,교육연구,국방군사
중간기점:자동차
'ㅈ'로 시작하는 용도(4): 자동차관련, 자원순환관련, 장례, 종교, 문화 및 집회시설
'ㅇ'로 시작하는 용도(7): 야영장,운동,운수,위락,위험물저장및처리,의료,업무
끝:야영장 - 장례
이렇게 하면 4개 용도를 추가하여 21개를 암기하게 된다. 여기서 보면 최초 야영장의 ‘장’이 자동차관련 ㅈ 용도에서 ‘장례’로 들어가 있다. 이런 글자들의 연결을 체크하는 것 만으로도 점점 기억이 강화된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야영장’은 이 암기의 종착지이자 ‘ㅇ’과 연결, ‘ㅈ’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뇌의 작동방식은 중간내용은 잘 기억이 안나도 시작과 끝은 잘 잊지 않는다. 우리가 유튜브에서 1분짜리 짧은 쇼츠를 볼 때 결말이 제대로 안나오면 화를 내는 댓글들을 흔히 보는데 그 이유는 뇌의 작동방식 때문이다. 기승전결에서 시작-‘기’와 결말-‘결’은 뇌가 자동적으로 기억을 강화한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뇌는 특히 결말 부분을 더 기억하기 때문에 위에서는 야영장에 여러가지를 갖다 붙혀도 잘 외워진다. 우리는 이 내용들을 끄집어낼 링크를 한 문장에 압축해두는 것이다. ‘주택에서 자동차로 야영장에 간다’ 안그러면 30개 중에 5개-10개 외우기도 벅찰지 모른다.
나머지 사항들
리스트는 보통 연관성이 있는 항목들이 모인 것이지만 전혀 연관이 없거나 딱히 공통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그럴 때는 나머지만 따로 모아둬서 외우면 된다. 필자의 경우 자음을 활용한 글자암기법으로 30종 중에 27개는 해결했는데 3개가 애매했다. 이 리스트에서는 ‘노유자시설, 판매시설, 동물 및 식물관련 시설’이었는데 이런 것들만 따로 정리해두면 된다.
리스트의 모든 항목에 어떤 법칙을 적용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면 버릴 필요가 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다. 자연의 법칙에도 예외가 있고 인간의 법도에도 예외가 있다. (시험공부는 주로 예외를 공부하는 것)
암기할 내용들을 정리하다 보면 8-90%는 분류가 되고 나머지가 예외라면 그 부분은 별도로 모아두면 된다. 위의 리스트를 정리할 때 필자도 30개 중에서 27개인 90%는 시작과 끝을 잡고 글자암기법으로 처리할 수 있었다. 나머지 3개는 예외로 처리한 것이다.
암기법의 적용
암기법은 목적에 맞게 적용하면 된다. 너무 과도한 암기법을 쓰면 정작 중요한 지식의 내용의 이해에 소홀할 수 있으니까 최소한의 기술로 암기하는 것이 좋다.
사회인의 공부가 대부분 그렇지만 일단 방대한 양을 기억하는 것이 메인인데 10-30개 정도의 리스트를 좀 더 쉽게 외울 수 있다면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필자는 공부암기법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가지를 시도해보고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은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