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효창공원은 서울 용산구 효창동원의 시립공원입니다. 여기는 백범 김구 기념관과 삼의사 묘, 의열사 등을 기리는 민족공원 같은 곳이고 체육시설도 있어서 시민들이 휴식처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 식민지 시절 무장 투쟁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초대 임시정부 국무회의 주석이셨습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김구 선생은 최고 지도자급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 권력 다툼에서 사실상 이승만에게 밀리기 시작하고 경교장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당합니다. (경교장: 지금의 종로 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 위치)
이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 아직도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 없고 역사가들의 평가와 추측만 남아있어서 김구 선생에 마지막 행보에 대하여 본질적인 논점이 흐려진 것도 일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의 생애를 조명할 때는 해방 후의 활동보다 중국에서의 항일활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의 지도자로써의 내용이 더 많습니다. 1945년8월15일 대한민국의 광복으로 인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맞으셨지만 그가 구상했던 남북한 통일정부는 수립되지 않았고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김구 선생을 표현하는 단어를 선택하면 ‘민족주의자’가 첫번째로 떠오르고 그 다음에는 ‘독립운동가’, ‘민족의 스승(선생)’, ‘임시정부 초대 주석’, ‘대한민국의 어른’ 등의 단어들이 있겠습니다. 워낙 파란만장한 세상을 살아간 의인이시기에 그 분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는 있으나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시기 위해서는 좋은 단어가 있으면 좋겠지요. ‘민족주의자’가 가장 보편적인 단어겠으나 필자는 민족의 스승이라던가 대한민국의 어른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그 이야기는 관람 후기를 써내려가면서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범 김구 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은 효창공원에 있습니다. 효창공원은 본래 조선 왕가의 묘였으나 광복 후 1946년 5월 김구 선생이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유해를 일본에서 발굴 후 송환하여 안장했고, 1946년 7월 안중근 의사의 가묘(현재까지 유해를 찾지 못함)도 안장했습니다. 그리고… 김구 선생 본인도 1949년 7월5일 효창공원에 안장되셨습니다.
지금은 각종 체육시설과, 백범기념관 등이 있는 국립공원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모여 있는 곳이라 나도 모르게 마음이 숙연해지는 곳이지요.

안내도를 보면 남쪽에 효창운동장이 있고 가운데 삼의사묘역 서북쪽으로 백범김구묘역이 보입니다. 산책로를 따라서 반시계방향으로 돌아도 되고 바로 서쪽길로 가면 백범김구묘역입니다. 기념관도 근처에 있습니다.

이때가 4월인데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2015년에 세긴 조형물에 김구 무궁화라고 써있습니다. 동그라미 두개는 김구 선생의 트레이드 마크인 동그란 안경을 상징하는 듯. 뒤에는 대한민국의 국화인 무궁화 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4월이라 무궁화 개화는 아직 멀었네요. 지금이 8월인데 지금 가면 무궁화를 볼 수 있겠네요.

윤봉길 무궁화도 있습니다. 시계 모양의 구멍은 김구 선생에게도 의미가 깊습니다. 바로 윤 의사의 홍커우 의거 때 윤 의사는 자기의 시계는 몇 시간 밖에 쓸 일이 없다며 김구 선생과 시계를 바꿉니다. 그 때 맞바꾼 시계가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남아있지요. (일반 박물관에서는 복원품을 볼 수 있다)

윤 의사와의 만남은 김구 선생도 평생에 잊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1932년 일제에 의해 윤 의사의 사형이 집행되고 1946년 그의 유해는 효창공원으로 돌아옵니다.(일제에 의해 암매장 되었던 윤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여 본국으로 송환한 것은 광복 후 김구 선생이 가장 먼저 챙겼던 일 중 하나이다. 김구 선생은 윤 의사의 모친도 찾아뵜다) 이를 보는 선생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참 슬프지요. 기록에는 김구 선생이 마지막으로 윤 의사에게 후일 봅시다 라고 되있습니다. 후일이지만 상황적으로 저세상에서 만나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구 선생의 일화 중에 윤봉길 의사와의 마지막 이야기가 가장 감명이 깊습니다. 독립운동의 리더였던 50대의 김구가 20대 초반의 이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를 일본 군대가 가득한 사지에 보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했을까?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 위에 광복을 맞은 김구 선생의 사명감은 무엇이었을까? 그 무게감이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것이 아니었을지 추측해 봅니다.

백범김구기념관 쪽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의열문입니다. 이 날은 개방이 안되어 있네요.

의열사는 이동녕, 김구, 조성환, 차리석,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의열문을 지나 안쪽에 있습니다. 임정요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이고 삼의사는 의거로 일제에 큰 타격을 입힌 의사 삼인입니다.

의열사
Uiyeolsa shrine
义烈祠 義烈祠
이곳은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1988년 효창공원 정비 공사 때 건립을 추진하여 1990년에 준공하였고, 그 이듬해에 이동녕 · 김구 · 조성환 · 차리석 · 이봉창·
윤봉길 · 백정기 등 7인의 영정과 위패를 이곳에 모셨다.7위선열을 기리는 추모 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 4월 13일 합동 추모 제전을 지낸 이래 계속 있었으며, 2011년부터는 전통 제례 방식을 따라 임시 정부 수립일(4월 11일)이나 환국일(11월 23일) 즈음에 ‘효창원 7위 선열 의열사 제전’을 거행 하고 있다.
그동안 의열사를 제한적으로 개방했으나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생생하게 느끼고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르도록 2016년 5월부터 상시로 개방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기념일 4월 11일로 변경 (2019년)
임정요인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 외 2회, 초대주석 외 3회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조성환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군무부장
차리석: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
삼의사
이봉창: 일본 동경에서 일왕에게 폭탄투척 의거
윤봉길: 상해 홍커우공원에서 시라카와 대장에게 폭탄투척 의거
백정기 :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 상해 육삼정 의거

의열사 팜플렛에는 8인이 나오는데 왼쪽 위가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 선생은 일제 강점기 초기에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다른 의사들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일제가 안중근의 명성을 두려워해 안 의사의 사형 집행 후 마음대로 암매장 하는 바람에 현재까지 유해가 송환되지 않고 있습니다. (안중근 우표까지 나왔을 정도로 당시 조선인들에게 크나큰 영웅이었다)
때문에 조금 시대적인 정리가 애매할 수는 있지만 항일 의거에 있어서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와 같은 맥락으로 의열사에 모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1909년이고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가 1932년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는 23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 사이에 역사에 기록된 주요 의거가 없었다는 것은 그 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지요.(개인의 뇌피셜임) 어쨋든 7인 + 1인이 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4월의 효창공원은 맑고 아름답습니다.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이기에 조국의 봄날을 기다렸던 대한독립투사들의 따스함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효창공원은 계절마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습니다.
백범김구 기념관은 스크롤 압박으로 다음 포스트에 작성합니다. Comming Soon~




